경계선에 선 예배자들

작성자
김동원목사
작성일
2026-06-22 21:44
조회
1726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과 신앙을 크게 흔든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레위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남유다로 돌아설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새로운 예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레위인들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가문이었기에 여로보암의 새로운 종교 정책에 협력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레위인들을 제사장 자리에서 내쫓고, 대신 일반 백성들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때 많은 레위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과 땅을 버리고 남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생계와 재산보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영적 이주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세기 초 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국가가 강요하는 종교 제도 속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위험한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부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혹독한 겨울과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끝까지 믿음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공동체는 훗날 미국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45년 이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배가 제한되고, 많은 성도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감옥에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고향과 재산을 뒤로한 채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붙잡은 것은 돈도 땅도 아니라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가난해질 수는 있어도 신앙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성도들은 남한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고, 한국교회 부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락교회와 같은 피난민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레위인들, 메이플라워의 청교도들, 그리고 북한에서 내려온 성도들은 모두 눈앞의 안전과 재산보다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익숙한 삶을 떠나야 했고, 미래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인들은 유다의 신앙을 지키는 기둥이 되었고, 청교도들은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놓았으며, 월남 성도들은 한국교회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선택의 순간을 만납니다. 편안함을 따를 것인가, 믿음을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역사는 믿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선택한 사람들은 길이 보였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걸어간 광야의 길을 새로운 축복의 길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레위인들과 청교도들, 그리고 월남 성도들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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