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차이를 만드시고,사람은 차별을 만든다-은혜주일-약2:1-250202
작성자
김동원목사
작성일
2025-02-04 15:53
조회
105
▶ *얼마 전 한국에 가서 대학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대학생때 기독교 클럽에서 같이 활동했던, 정말 신실한 친구들입니다. 제가 그 친구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평신도로서 목사친구에게 조언 좀 해달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는 친구가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대학교수들이 참 많아. 목사님이 대학교수인 사람이 새가족으로 오면 일어서서 박수를 쳐줘. 그런데 교수가 아닌 새가족은 박수 안 쳐줘. 그리고 목사님이 인사도 잘 안 받아주셔. 너는 교인들 차별하지 마라.”
*교회 안에는 차별이 없을까요? 교회에 차별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목사가 교인 차별하는 것도 저는 봤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차별이 있는 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더 좋은 교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2 하나님은 차이를 만드시고, 사람은 차별을 만든다.
*우리는 차이와 차별을 알아야 합니다.
차이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좋은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차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차별은 사람이 만듭니다. 이렇게 아시면 가장 확실한 구별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들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아멘.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를 나중에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 중에 누가 더 최신형인가요? 여자가 더 최신형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신형에 기능이 더 많이 있고, 최신형이 수명이 더 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생물학적으로 다릅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섬세하게 만드셨습니다. 어떤게 더 좋은 것인가요? 예전에는 남자가 더 좋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낳으면 더 좋아했었습니다. 요즘은 아들이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유행은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고, ▶사람들은 그 차이에 가치를 붙여서 차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백인, 흑인, 동양인을 만드셨습니다. 혹시 여기 동양인이 되고 싶어서 선택하신 분 계신가요? 이건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습니다. 뭐가 좋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느 인종이 더 뛰어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습니다. 차별이 아닙니다.
*어느 흑인이 여행을 하다가 백인동네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 흑인은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백인교회에 갔다가 쫓겨났습니다. “당신은 흑인이니 여기 못 들어온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흑인교회는 없다.”고 했습니다. 흑인은 교회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예배당 안에서 들리는 찬송가를 따라부르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흑인의 마음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나도 저 교회에는 못 들어간다.” 차별이 있는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일난성 쌍둥이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키가 다르고, 몸집이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키가 큰 것이 좋고, 날씬한 것이 좋다고 하며 사람을 차별합니다. 저같이 키 작은 사람은 차별을 당합니다.
*지난 목요일 성경읽기모임을 하면서, 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유독 우리 교회 여자분들은 키 큰 분이 많습니다. “키작은 남자는 땅에 붙어 다닌다.”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키작은 저같은 사람은 대접을 못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키 작은 사람을 더 존중합니다. 키큰 사람은 사울, 골리앗이 있구요. 키 작은 사람은 다윗이 있습니다. 키 작은 사람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가치를 붙여서 차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합니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이것은 차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한국교회 안에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남녀차별입니다. 요즘 세상에 무슨 남녀차별이 있냐고 물으시는 분들은 대부분 남자분들일 겁니다. 한국교회 안에 남자가 하는 역할이 있고, 여자가 하는 역할이 구분되어 있나요? 그 자체로 남녀차별입니다. 그 차별을 깨기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남자분들도 설거지 당번으로 섬길 수 있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삼상16:7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아멘.
*사람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예쁘다. 저 사람은 멋지다. 저 사람은 돈 많아 보인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첫번째 왕인 사울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사울이 키가 크고 잘 생겼기때문에 백성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래봐야, 골리앗 옆에 서면 사울은 작고 초라한 왕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다윗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왕이 될 사람이 이렇게 작은 소년이어서는 안 된다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셨지만, 사람들은 그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차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에 있는 무엇을 보실까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외에는 큰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돈 자랑을 하겠습니까? 건강을 자랑하겠습니까? 직업을 자랑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준비하는 우리의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배꼽티셔츠라는 패션이 유행을 했어요. 배꼽이 보이는 옷을 여자들이 입고 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패션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 여자 청년도 배꼽티를 입고 나타났어요. 제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이 그 모습을 보고, 그 여자청년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니, 교회에 오려면 단정한 옷을 입고 와야지, Sunday Best 몰라? 배꼽티를 입고 오면 어떻게 하나?” 그러자 그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설교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셔서 배꼽티를 입고 왔습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교회에 오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만드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차이에 가치를 붙여서 차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2 교회안의 차별을 없애라.
*저는 교회청년부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앉을 자리가 없더라구요. 빈자리가 있는 곳이 있어서 자리를 잡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분이 저를 째려보셨습니다. 그리고 청년부 회원들도 저를 째려보더라구요.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제가 실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그 자리는 장로석이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장로석이 따로 있어서, 그 자리는 장로님들만 앉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감히 장로석에 앉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장로가 될 계획이라서 그 자리에 앉았다”고 변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교회는 왜 장로와 평신도를 차별하는 것일까요?
*초대교회에도 차별이 있었을까요?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교인들을 차별한 기록이 있습니다.
▶약2:3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아멘.
▶*야고보가 섬겼던 예루살렘교회에도 이런 차별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멋진 옷을 입고 교회에 오면, 환영을 하고, 좋은 자리를 내어줬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 예배를 드리러 오면,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땅바닥에 앉으라.”고 무시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부자와 가난한자를 차별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녀온 주일날 오후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다투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은 돈없어서 장로 못해.” 그날 목사님께서 아버지께 장로로 교회를 섬겨달라고 부탁을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장로를 하면 돈을 많이 내야하기때문에 우리 집 형편상 장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장로되는 분들이 돈을 모아서 교회 밴을 하나 사기로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게 말도 안되는 일인데,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일꾼과 종을 세우는데, 종이 돈이 필요하면, 그게 종인가요? 저는 그때 마음을 먹었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이런 일은 없게 하겠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일꾼을 뽑을 때, 교회에 어떤 선물도 못 하게 합니다. 종은 몸으로 섬기는 거지, 돈으로 섬기면 그건 종은 아닙니다. 교회는 돈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행6:1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기네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었다. 아멘.
▶*예루살렘교회 안에는 다른 종류의 차별도 있었습니다. 언어와 출신의 차이로 교인들을 차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히브리말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그룹이 하나 있었는데, 오랜 외국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말을 사용했습니다. 교회 안에 두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과부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줬는데, 히브리파 과부들은 구제물품을 잘 받았는데, 그리스파 과부들은 구제물품을 잘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구제업무를 담당했던 사도들이 히브리인들이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어를 할 줄도 몰랐고, 그리스어를 쓰는 과부들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도 없었기때문에 생긴 차별이었습니다.
어쩌면 에피소드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예루살렘교회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차별이 있으면, 그건 교회가 아니기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구제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7집사를 뽑습니다. 당연히 히브리파와 그리스파를 섞어서 뽑았겠죠? 4명은 히브피파, 3명은 그리스파로 뽑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아주 과격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행6:5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아멘.
*이름만으로 판단을 한다면, 이 이름은 모두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7명 모두를 그리스파로 뽑아버린 것입니다. 차별을 막기 위해서는 공평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당한 사람을 더 귀하게 섬겨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차별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교회는 더 부흥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교회 안에 지역적인 차별이 있을 수 있나요? 있더라구요. 한국에 가면 지역별로 목사가 갈 수 있는 교회가 있고, 못 가는 교회가 있습니다. 전라도목사만 뽑는 교회가 있구요. 경상도목사만 뽑는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섬겼던 교회는 이북출신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무조건 이북출신만 뽑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이 이북출신인 목사만 뽑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캘리포니아보다 작은 나라에서 지역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는 지역으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저의 아버지는 경상도, 어머니는 충청도, 저는 서울, 아내는 전라도, 아들은 경기도 출신입니다. 가끔 전라도사람이 경기도 사람을 더 많이 편애하기는 하지만, 저희 가정은 주님 안에서 차별이 없는 가정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나온 사건을 보면, 교회 안에 언어의 갈등과 차별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때문에 그룹이 나뉘고, 언어때문에 차별을 합니다.
한인 교회에서는 한국말을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어쓰는 사람은 좀 더 적습니다. 그래서 한인교회는 주로 한국말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영어쓰는 사람에게 불편하게 돌아갑니다.
얼마 전에 동네 미국인이 저를 만나러 교회에 왔습니다. 우리 교인 하나가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알려줬습니다. “목사님. 외국사람이 왔어요.” 사실 그 사람이 미국사람이고, 제가 외국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는 언어의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 몇 년 전부터 설교 영어 자막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 서비스 덕분에 영어권 교인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1세들이 2세들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인근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영어권 청년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교회의 한어권들이 영어권을 차별했습니다. 영어권은 오후예배드리고, 한어권은 오전 11시예배를 드렸습니다. 영어권은 항상 차별을 당했고, 화가나서 영어권이 밖으로 나가서 영어권교회를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영어권교회는 얼마지나지 않아서 교회 문을 닫았습니다. 행복한 교회가 차별때문에 서로 불행해진 사건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인교회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조선(한국의 옛 이름)에 처음 교회가 들어왔을 때, 조선사회는 양반과 상놈으로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는 사회였습니다. 양반은 상놈을 철저하게 차별했습니다. 이게 그 당시 사회의 질서였습니다. 우리 미국장로교 선교사님들이 조선에서 이런 차별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미국장로교는 차별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평등하게 운영했습니다. 교회의 평등 때문에 조선사회로부터 엄청난 비판과 박해를 교회가 받았습니다. 그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조선 왕족 출신인 조덕삼이라는 사람과 그 집에서 머슴으로 사는 이자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같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머슴인 이자익이 더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에 장로를 뽑는 투표를 했는데,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이 이자익을 장로로 뽑고, 조덕삼은 떨어진 것입니다. 투표결과를 목사님이 발표하셨는데, 교인들은 이제 큰 일 났구나! 염려를 하며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조덕삼이 발언권을 신청하고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분명히 조덕삼은 마음이 상해서 교회를 떠난다는 말을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조덕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께서 내린 결정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참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이자익집사가 저보다 훨씬 믿음이 좋습니다. 저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을 장로로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한 후,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에게 순종했고,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서 목사로 세웠습니다. 이자익보다 조덕삼이 훨씬 대단합니다.
불평등한 조선사회가 기독교를 믿었던 이유는, 교회에는 차별이 없었기때문입니다.
▶*교회는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내 눈에 있는 차별이라는 선글라스를 벗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차별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조덕삼처럼 우리가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차별없는 교회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 안에서 평등한 형제와 자매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은 영혼인 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차이를 만드시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 차이에 가치를 붙여서 차별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그 차이가 좋다 나쁘다 가치를 생각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차별을 회개합니다. 남여의 성별로 차별했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했습니다.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했고, 능력으로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 안의 차별을 없애게 하여 주옵소서. 지역과 언어와 국적으로 차별하지 말게 하여 주옵시고. 오직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막힌 담을 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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