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과거 - 060728 은혜 금요 청년부수련회

작성자
Dongwon
작성일
2006-08-02 18:27
조회
12592




오늘 설교말씀을 위해서 요셉에 대해서 많이 묵상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일단 요셉하면 생각나는 것은 저희 처남 장요셉군이 생각이 납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청년부 수련회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같이 은혜받는 시간 되시기를 원하고, 좀 젊어지는 시간되시기를 원합니다.



소재를 요셉으로 정하고, 주제를 비전의 사람으로 잡았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꿈과 비전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집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당신 이름은 꽃이름(백장미)인데, 처남이름은 요셉요? 그랬더니 집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고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모세로 하려고 했더니, 모세는 사람을 죽였잖아요. 그래서 모세는 탈락. 그리고 모세라고 지으면, 많은 놀림을 받습니다. 물을 갈라봐 갈라봐...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으로 지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제 처남은 꿈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요셉을 이해하려면, 그의 꿈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꿈으로 그는 고난을 받고, 그 꿈으로 그는 성공합니다. 요셉의 모든 것은 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꿈은 이것입니다. 추수한 곡식단이 있는데, 형님들의 단이 나의 단에 절을 하더라. 두 번째 꿈은 해, 달 별 11개가 나에게 절을 하더라. 이런 내용입니다. 이게 뭡니까?



해는 아버지-야곱, 달은 어머니들, 그리고 별 11개는 형제들을 말합니다. 이 꿈의 내용을 형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꿈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보통 꿈 생각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돼지꿈 생각나세요? 돼지꿈 꾸면, 복권사야죠? 저의 아버지께서 젊을 적에 주택복권이라는 것을 항상 모으셨습니다. 매주 사시데요. 제가 어릴 적에 많이 보았습니다. 안되데요. 돼지꿈을 꿔야 된다고 해서, 맨날 돼지 사진 보고 잠을 자도 돼지꿈은 안꿔지데요.



이 꿈과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꿈은 다릅니다. 꿈은 무의식적인 현상입니다. “수면 중에 착각적·환각적으로 체험하는 감상성 심상”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옵니다. 그런 꿈을 dream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돼지를 키우는 분들은 꿈에서 종종 돼지꿈을 꾼답니다. 그러나, 복권을 사봐도 잘 되지는 안는다고 해요. 이건 사람의 꿈입니다. 보통 개꿈이라고 하죠. 망상을 이런 꿈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요셉이 꾸는 꿈은 Vision입니다. 사람이 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비젼입니다.

망상 - 야망 - 비전

그리고 주의하셔야 개념이 야망입니다. ambition이라고 하죠. 비전과 야망은 구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 목적 자체를 놓고 보면, 구별이 안되요. 비전은 위로부터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비전입니다. 야망은 다릅니다. 야망은 내 속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를 비전으로 하시는 분도 있고, 야망으로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자기의 출세욕, 권세욕, 물질욕을 체우는 수단으로 목회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참 불쌍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들도 자기가 야망으로 사는지, 비전으로 사는지 구별을 못해요.



사업을 하시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가지고 사업을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반대로 내 출세를 위해서, 남을 해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예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두분은 모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사람입니다. 나의 조국 이스라엘을 저 악한 블레셋무리에게서 구해내겠다라는 일념은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그 일념은 야망이었고, 다윗에게 그 일념은 비전이었습니다. 사울이 품은 마음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후에 알게 되었지요.



우리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야망 때문에 역사를 망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먼 역사가 아닙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동족들을 학살한 대통령은 지금도 그의 야망이 비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야망은 남을 해칩니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소망을 줍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야망을 가지고, 이스라엘백성들을 돕습니다. 그러다 처절하게 실패하고 도망자가 됩니다. 나이 80이라는 나이에 그는 부르심을 받고 비전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큰 지도자로 거듭납니다.



이제 비전과 야망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야망은 남을 해칩니다. 야망은 나를 위해서 남을 희생시킵니다. 우리는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지, 야망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비전과 야망은 너무 비슷해서, 저도 헤깔리고, 본인도 구별 못합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 하는 꿈깨! 라는 말의 꿈은 망상을 이야기 합니다. 야망은 자기 개발이 없고,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나의 욕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Desire)

그러나 비전은 다릅니다. 미래를 향하기는 야망과 같지만, 긍정적인 것을 봅니다. 자기 계발을 합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망상의 사람도 아니고, 야망의 사람도 아니고, 비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처남이름이 되는 영광을 가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욕망대로 남을 해칠 지라도 나의 성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용서되는 야망입니까? 오히려 남을 위해서 살고, 남을 위해서 헌신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비전입니까?



역사는 야망의 사람이 망칩니다. 그러나 역사는 비전의 사람이 세웁니다.



요즘 참 안타까운 일을 봅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분쟁을 보면 참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서로 자국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다투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전투기들이 레바논의 베이루트시내를 폭격하고 있습니다. 많은 민간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조종사의 고백입니다. ‘나쁜 놈만 맞고, 민간인은 피해가기를...’ 말대로 됩니까? 수많은 민간인 아이들, 여자들이 죽어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들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들이 비전일까요? 야망일까요?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어린시절은 참 달랐습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은 어떻습니까?

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아멘.



어린시절이라고 말씀드리기도 부끄럽습니다. 나이 17세라고 합니다. 절대로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던 라헬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아마도 라헬은 꽤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셉도 외모가 출중했다고 합니다.(저는 외모가 출중하지 못해서, 자식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은 아내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셉에게 좋은 옷 입히고, 좋은 것 먹여서 키웁니다. 그 17살 먹은 아들이 뭘 합니까?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고자질을 했다는 겁니다. 형들 고자질하고, 형들 일 잘하나 감독하는 사람으로 섰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고자질하는 사람은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상관에게는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런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그러나 정말 얄밉습니다.



양치기들은 입어볼 수도 없는 좋은 옷 입고 다니지, 양은 치지도 않고 감독이나 하면서 고자질 하지, 형들이 종이 된다는 꿈이나 꾸고 있지, 꿨으면 꿨지, 그걸 왜 방정을 떨면서 형제들에게 말하고, 아버지에게까지 말해서 그 고난을 당합니까?



여러분 17세된 다 큰 청년 요셉은 어떻습니까? 아주 부족한 인간이며, 따돌림 당해 마땅한 인간입니다. 그 요셉을 하나님께서 뭐로 바꾸십니까? 고난으로 바꾸십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충격이 요셉에게는 있었습니다. 상처를 줘도 누가 줍니까? 형제간에 줍니다. 형제간... 몹쓸 짓을 했습니다.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먼사람들은 큰 충격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충격은 나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믿었던 부모님이 실망을 줍니다. 가장 믿었던 아들딸이 배신을 합니다. 가장 믿었던 형제자매들이 나를 좌절시킵니다. 믿은 만큼 충격도 큽니다. 믿은 만큼 좌절도 심합니다. 믿은 만큼 회복도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형들이 동생을 죽이기로 했다가 아랍상인들에게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립니다.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아멘.



동생을 파는 모습이 어떠했다고 합니까? 애걸했다고 합니다.

요셉: 형님들 내가 잘못했어요. 잘 할께요. 다시는 안그럴께요. 형님. 제발 살려만 주세요. 형님 제발 살려주세요...

형님: 저런 놈은 죽어도 싸. 가서 죽도록 남의 종으로 살다 죽어라! 나가 죽어라! 이놈 요셉. 이제 아버지도 없는 곳에서 고생하며 살아봐라 이놈.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그 동생을 매몰차게 팔아버리는 그 형님들... 그 형님들은 잘 살았던가요? 아니요. 평생동안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42:21의 말씀은 형님들이 반대로 요셉에게 희롱을 당하면서,

‘우리가 요셉이 살려달라고 애걸하는데, 그걸 죽이려고 하고, 노예로 팔아버려서 지금 이벌을 받지....’

한때의 분노와 좌절로 저지른 일을 평생동안 죄책감으로 살아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죄는 용서되도, 기억은 남습니다. 죄를 지은 기억은 남습니다. 야망으로 팔아넘긴 내 동생이 꿈 속에 나타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한평생 그 형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구덩이에 밀어 넣고 자기를 희롱하던 형님들의 비웃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살려달라고 그렇게 애걸했는데, 너 같은 놈은 죽어도 싸다고 생명부지 아랍인들에게 팔아버리는 저주스러운 형들의 모습은 매일 매일 생각나는 악몽의 일부입니다. 내가 출세해서 죽이고 말겠다고 맹세를 해봅니다. 매일 매일 복수할 형들의 얼굴과 이름을 암송하며 기억합니다. 그런 그에게 평안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형들앞에서 쑈를 합니다. 연기를 합니다. 동생이 아닌 척 기가 막히게 연기를 하며 속입니다. (실제로 예상한 답이 안나오면, 못알아 듣습니다.) 그러다가도, 자기가 당한 그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아멘.



실제로 요셉은 형들을 심문하면서, 3번을 몰래 가서 울고 옵니다. 왜 울었을까요? 평생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그 고통의 상처와 기억들이 자기를 너무 괴롭혀요. 내가 왜 그렇게 밖에 못했나? 에 대한 자책감과 콤플렉스, 피를 나눈 형제들인데...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하나? 저주서린 원망으로 도무지 형들을 볼 힘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의 이름을 보십시오.

41: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41: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아멘.



요셉은 출세해서 애굽여자, 외국인이죠. 국제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므낫세의 뜻이 뭡니까? 에브라임의 뜻은 뭡니까?

여기는 고상하게 고난과 수고라고 나오지만, 영어로는 trouble과 suffering입니다. 고통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아이들의 이름에 고통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요셉의 삶은... 그가 겪은 그 고통스러운 과거들을 잊으려고 노력하던 삶이었던 것입니다. 잊으려고 잊으려고 생각나는 형들의 얼굴이 그를 슬프게 합니다.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요셉은 30살이라는 나이에 총리가 됩니다. 바로왕이 옥쇠를 빼어서 요셉에게 줍니다. 그리고 국왕다음의 2인자로 세웁니다. 출세했습니다. 그 출세한 요셉이 뭐합니까? 외국인들이 쌀을 사러 오면 직접 외국인들 만나서 쌀을 팔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총리가 하는 일입니까? 제가 쌀장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총리는 일일이 외국에서 오는 외국인들을 만나서 쌀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왜 요셉이 쌀장수했을까요? 형들이 올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들이 배고파 죽기 싫으면 여기에 오겠지. 그 죽도록 보기 싫은 형들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왜요? 아무리 잘나봐야. 아무리 출세해 봐야. 요셉은 그냥 잘난 외국인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애굽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그리운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너무 보고 싶습니다. 미운 형들이지만, 복수하고 싶은 형들이지만, 정말 보고 싶습니다. 이방나라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차별받고, 괄시 받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과 이렇게 똑같습니까? 좋은 차 몰고, 좋은 집에 살면 내가 한국사람아닙니까? 내가 미국사람됩니까? 아니잖아요? 요셉의 마음입니다. 나그네의 마음입니다. 죽도록 미운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그 마음. 그 심정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경험해 보셨습니까?



요셉의 과거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연속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뻘떡깨는 악몽같은 과거를 안고, 형들에게 복수하리라.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출세해서, 멋지게 복수하리라. 실제로 요셉은 형들을 만나자, 이렇게 저렇게 복수를 꾀하고 골탕을 먹입니다. 통쾌합니까? 아니요.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형들을 심문하다가 본인만 3번 웁니다. 나가서 대성 통곡을 합니다. 왜요? 내 고난의 시간이 너무 원통하고, 그래도 용서할 수밖에 없고, 그래도 너무 보고 싶은 형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셉은 그 고통을 극복합니다. 그 고통을 극복하고 나서, 요셉은 바른 신앙인으로 거듭납니다. 그 고통과 저주스러운 과거를 잊고 용서할 수 있던 비결은 뭡니까?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아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니까 답이 보여요.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들을 통해서, 나를 이리로 보낸 거였어요. 안그러면, 가족들이 흉년에 모두 가나안 땅에서 굶어 죽으니까. 안그러면, 우리가족이 하나님의 약속하심대로 큰 민족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니까.



하나님을 보니까 용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에 요셉은 그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감싸 안고 엉엉울 수가 있었습니다.

형님들! 왜 나를 이렇게 팔아먹었습니까? 왜 나를 종으로 팝니까? 왜 내가 감옥에 들어갑니까? 왜 내가 여기서 이런 대접받으며, 외국인이라 차별받으며 살아야 됩니까? 형님!

나 형님들 다용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같이 만들어 주시고, 나를 지켜주신 것을 보며, 나는 형님들 다 용서합니다.



요셉의 과거는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입니다. 형들을 용서하고, 나의 사랑하는 형들로 인정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받을 만 해서 사랑한게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사랑받을만 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과거를 치료하십니다. 나에겐 어떤 상처가 있습니까? 나의 과거에 어떤 기억과 악몽들이 나에게 상처를 줍니까?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세요. 그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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