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의미 - 은혜 금요 060414

작성자
Dongwon
작성일
2006-04-22 16:08
조회
25737
십자가의 의미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를 하던 때입니다. 초등학교1,2학년, 즉 유년부전도사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노회에서 주관하는 성경퀴즈대회에 나갔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자기 다니는 교회이름을 썼는데, 촌신교회라고 쓴겁니다. 걔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촌신교회라는 교회는 서노회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결론은 어떤 아이가 건너 편에 앉은 아이의 답안지를 컨닝하다가 자기 이름과 교회이름까지 베껴 쓴 웃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컨닝한 교회 이름이 신촌교회였어요. 거꾸로 봤으니 촌신교회가 되죠?

그런데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참 다른 답들이 보이나 봅니다. 문제가 이거였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 중에 마지막 하신 말씀은?’

여러 가지 답들이 있었는데, 배꼽 잡고 웃었습니다.

1. 아~! 포도주가 먹고 싶다.

2. 아야.

너무 솔직한 표현이지요? 한참을 웃었습니다. 이것도 외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네여! 엘내다아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눅 23:34

2.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34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

4. 엘리엘리라마사막다니 마 27: 46

5.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6. 다 이루었다. 요 19:30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물론 이 아이가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참으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저분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고난같이 여겨지지는 않고 있습니까? 당연히 지실 짐을 지시는 분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얼마전 패션오브크라이스트 보셨죠?, 너무도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서 몸부림치시는 주님의 모습이 제게는 너무 생소한 것입니다. ‘헛 믿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우아한 희생의 자리가 아니라, 극악범들이 당하는 법정 최고형의 저주받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나 대신 가신 것입니다.



태형(화면1)



예수님께선 대부분의 죄수들이 기절하거나 미치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태형을 탕하셨습니다. 예비형벌인 채찍질은 죄수의 옷을 벗겨 등을 들어 내고 허리를 굽게 하여 기둥에 묶든지 틀에 달아 맨 다음 금속조각이나 날카로운 뼈조각들, 유리조각들이 달려있는 가죽채찍으로 사정없이 어깨를 시작으로 등, 엉덩이, 정강이까지 계속해서 내려치는 형벌입니다.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유리공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채찍에도 유리조각을 달았던 거죠.

그 채찍으로 맞으면 채찍에 달려있던 것들이 살에 박혔다가 빠지면서 살점들이 같이 떨어져 나가고 핏줄들이 터지게 됩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어지게 되고, 심지어 척추뼈가 드러나기도 하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태형만 당하고서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화면2)십자가형은 열십자(十)모양의 형틀입니다. 열십자인 이유는 사람의 사지를 효과적으로 고정시키기 위함입니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서 처음 개발된 형벌로서, 인간이 개발한 사형의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 방법은 로마제국으로 도입되어서 노예나 흉악범에게만 적용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특권 중에 십자가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죽을 권리까지 나왔겠습니까? 무게는 약 57kg(125파운드) 정도 됩니다. 무릎이 부서집니다



(화면3)3개의 못은 손과 발을 관통합니다. 약 8인치정도의 길이입니다.



(화면4)구체적으로 이 십자가형으로 죽는 사람의 사인은 질식사입니다. 사람을 천천히 질식 시켜서 죽이는 것입니다. 못 박힌 손으로 체중을 지탱하다보면, 힘들어서 자꾸 사람이 밑으로 처지게 됩니다. 그러면 폐에 이산화탄소가 차서, 숨이 막힙니다. 막힌 숨을 쉬기 위해서 못박힌 손을 이용해서 위로 올라가야 됩니다. 이렇게 몇 시간 혹은 몇일을 지탱하면서 고통스럽게 죽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것은 사람을 벗겨서 사람보는 앞에 세워서 죽이기에 본인과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수치요 굴욕이 되는 것입니다. (화면사라짐)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그 잔인함에 몸서리쳤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돌아가셔도, 이런 잔인한 죽임으로 돌아가셔야 했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런 길을 가셨습니까? 저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찾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십자가는 고난의 다리입니다.

교회와 병원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1) 다 열십자 표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합니다. 교회는 영혼구원, 병원은 육신의 구원을 추구하지요.

3) 목사나 의사나 가운을 입는다.

4) 둘다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이다.

반대로 다른 점은

1) 교회 십자가는 위아래로 좀 깁니다.

2) 병원에는 의사가 있고, 교회에는 목사가 있습니다.

3) 병원은 내라는 만큼 내야 되고, 교회는 내고 싶은 만큼 냅니다.



왜 십자가가 열십자로 생겼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이 십자가의 모양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사람을 고정시켜서 꼼짝 못하게 하고 죽일 목적으로 만든 처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쳐다 보기도 싫은 처형틀을 다른 의미로 바꿔놓았습니다. 바로 다리입니다. 다리가 뭐지요? 다리는 뭔가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세로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백성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1년에 한번씩 죄를 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속죄일이라는 날이죠.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과 연결될 수가 없는 이방인입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세로횡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희생의 다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뭐라고 마칩니까?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끝내죠?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의 가로횡은 인간간의 관계, 화해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가로횡, 즉 사람사이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에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이 화해의 삶이었습니다. 평생,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고, 상한 마음이 있는 사람을 치료하기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참으로 십자가는 갈라진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회복의 다리입니다.



십자가는 다리입니다. 고통스럽게 만든 화해의 다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과 원활히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갈라진 사람과 활발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다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 하나되시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 십자가는 사랑의 모범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는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지셔야만 했습니까? 안지면 안되는 겁니까? 그 가장 큰 이유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지시지 않으시면,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지고가야 될 무거운 죄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구약에 예고된 것입니다. 바로 유월절의 제사가 그러합니다. 유월절에 잡는 제물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양이지요. 뭐든지, 새끼는 이쁘고, 새끼는 가여운 법입니다. 이렇게 어린 양을 잡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집에 장자가 죽어야 할 것을 이 흠없고 불쌍한 어린양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피를 문에 바른 가정만 장자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유월절의 희생이 되는 어린양사건입니다.

(내가 대신 죽을게)이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더 이상 우리는 그 구약의 짐승을 잡는 제사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할 제물을, 이제는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주님께서 직접 완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주님은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자신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 잔을 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무리에게까지 복을 비시고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가실 때, 화가난 베드로는 가지고 다니던 칼을 가지고, 말고라는 종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베드로의 칼 솜씨가 대단하지요? 내가 잡혀가는데, 옆에서 도와주면, 고마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서 고쳐주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혼냅니다.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구요’ 복수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감싸라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이다”

자신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찌 이런 용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십자가는 예수님 가르침의 결정체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가르침과 행동이 다릅니다. 영생교 교주는 죽은 시체를 일으켜 세운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그는 지금 살인교사혐의로 감방에서 부활절을 맞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생을 가르친 교주들이, 사랑을 말한 사람들이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용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 쪽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그분의 가르침을 너무도 절절하게 실천한 사건이 바로 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셋째, 십자가 상에서까지 전도하셨습니다.

주님도 고통을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은 전도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영혼구원을 위해서 힘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까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면 이길 수 없는 시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어찌 이보다 큰 용서가 있겠습니까? 이 용서을 볼 때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용서는 사랑을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인 복수는 멸망을 부릅니다.

토끼가 약국에 갔습니다. 약국에 가서 물었습니다.

‘당근 있어요?’

‘없다.’

조금 뒤에 다시 토끼가 왔습니다.

‘당근 있어요?’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없다.’ 너 다시 한번 와서 당근 있어요? 라고 하면 이 가위로 귀를 싹뚝 잘라버린다!

잠시 뒤에 토끼가 와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가위 있어요?’

‘아니 없다.’ 그러자 토끼는 도망가며 말해습니다. ‘당근있어요?’



그 토끼가 이번에는 구멍가게에 갔습니다.

아저씨 콜라 얼마에요? 천원이다. 그러면 5병 주세요. 5병을 주자 이 토끼가 5000원을 10원짜리로 500개를 땅에 뿌리고 도망가는 겁니다. 하루 종일 이를 갈며 주었습니다.

다음 날 이 토끼가 또 왔네요. 이 토끼가 와서 또 콜라 5병을 시키는 겁니다. 이번에는 안그러겠지...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또 10원짜리 500개를 땅에 뿌리고 도망가네요. 이를 갈며 복수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날 이 토끼가 또 와서 콜라 5병을 시키고 이번에는 만원짜리를 줬습니다. 10원짜를 못구했나봅니다. 그러자. 기회다! 이 아저씨가 거스름 돈 5천원을 10원짜리로 땅바닥에 뿌렸습니다. 너무나 통쾌해 하는 아저씨에게 토끼가 말했습니다. 아저씨~! 콜라 5병 더주세요.



복수는 복수를 부릅니다. 반대로 용서는 사랑과 평화를 부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내가 이렇게 용서하듯이 너희들도 서로 용서해라’라는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아 어디가나 용서와 사랑의 본을 보이시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십자가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오해를 합니다.

1) 고난과 영광을 떼어서 생각하려 합니다. 받기 싫은 고난은 던져버리고 받고 싶은 영광만 받으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래요. 힘들고 어려운 소위 3d직분은 안하려고 합니다. 3d가 뭐죠? dirty, difficult, dangerous 지요? 그러나 고난이 없이는 영광받을 자리도 없습니다. 춘향이가 수청을 거절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싫어서 변사또에게 붙었으면, 이도령 금의환향했을 때, 영광이 있었겠습니까? 없지요.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2) 고난과 영광의 순서를 바꾸려 합니다. 먼저 영광을 보여주시면, 그 영광 누려보고, 그 영광 받아보고, 고난당하지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성경의 순서는 고난 후에 영광입니다. 고난주간 다음에 부활절이 오는겁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에 너무나 큰 거부감을 느낍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피해가려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님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없었다면, 영광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때는 역대 최악의 황제인 네로가 로마를 통치하던 때입니다. 네로는 새 로마의 건설을 위하여, 구 로마시에 불을 질렀습니다. 재개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씌웠습니다. 불순분자들이 로마를 무너뜨리려 불을 질렀노라고 말입니다. 전대미문의 박해가 가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길가에 서있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기독교인들의 신음소리가 진동했습니다. 그 길 사이를 허겁지겁 도망치던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였습니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베드로의 앞에 잊을 수 없는 얼굴 하나가 지나갑니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그 주님입니다. 주님을 붙잡고 묻습니다. “Quo Vadis, Domine,”(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난 네가 버린 로마로 십자가에 못박혀 다시 죽으러 가노라’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발걸음을 돌려 다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 감히 내가 어찌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박혀 죽겠습니까? 저는 거꾸로 박아서 죽여주십시오. 그리고 베드로는 처참하게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묻습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이 고난주간에 어디가십니까?) ‘난 네가 지지 안고 놔두고 간 십자가를 오늘도 대신 지러 간다.’

주님의 십자가 만이 살길입니다. 십자가로 인한 회복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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