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 - 롬12:1 060611 은혜 주일

작성자
김동원목사
작성일
2006-06-16 12:45
조회
11502




구약성서/창4:3~5(5면)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아멘.




신약성서/롬12:1,2(256면)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멘.



어떤 목사님께서 거룩한 주일날 설교를 하는데, 한 집사님이 성가대석 맨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 깨울까? 하다가... 아이구... 어제 밤늦게까지 한국비디오 보셨구만... 얼마나 고향생각이 나면 저럴까???

마치고 나가는데, 한마디 했답니다.

목사님: 아니 집사님! 거룩한 주일날 30분도 안 되는 설교시간에 조십니까?

그러자 집사님이 웃으며 말합니다.

집사님: 아니 목사님! 저를 30분동안도 깨어있게 못하십니까?



시작하고 조는 것은 제 책임, 시작 전에 조는 것은 본인 책임입니다.



자. 거룩한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셨습니다.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무엇일까요? 오늘 사도바울의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삶과 예배가 거룩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은 정확하게 12장이 분기점이 됩니다. 1-11장까지는 규범적인 말씀이 있고요. 12장부터는 실천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12장에 나뉘고 있습니다.



11장까지, 사도바울은 구원, 심판, 율법 등 어려운 주제를 다룹니다. 그래서 로마서 앞 부분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12장에서부터 구체적인 지시들로 바뀌는거죠. 앞에서 말한 어려운 개념들을 어떻게 살면서 실천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첫번째가 무엇일까요?  그 처음 나온 말씀이 바로 12장의 말씀입니다.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 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거룩한 산제사드리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어로 살펴보면, ‘비슷하게 만든다, 같은 모양으로 만든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방한다는 말입니다. 뭐 새로운 창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무분별하게 그냥 따라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무분별하게 따라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요즘 세상이 어떻습니까? 따라할 만한 본받을 만한 세상이 아니라고 2000년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고, 그 말씀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데로 그냥 따라가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요즘 세상이 어떻습니까? 반기독교 문화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설로 유명했고, 최근 영화화된 다빈치코드라는 책이 있죠? 이 영화를 놓고 반응이 다양합니다.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보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해달라고 재판을 받기도 했구요. 물론, 졌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상영되었습니다. 기독교측에서는 영화안보기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극장 앞에 가면, 1명씩 돌아가면서 일인시위를 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조사인데, 기독교인들 중에서 5%가 이 소설과 영화로 인해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를 버리게 되었다는 통계자료를 봤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이거 그냥 그럴 듯한 소설이거든요. 소설은 fiction입니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세상의 풍조에 이리휘청 저리휘청하는 것을 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가 이까짓 소설하나에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나요? 거짓인데... 그럴듯한 이야기로 둘러댄 거짓인데...

요즘 인터넷은 어떻습니까? 순 세상적인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왠 약장사들은 그렇게 많은지. 저에게도 약장수들이 하루에도 몇통씩 날아옵니다. 음란한 것들도 많고, 부도덕한 것 들도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이 컴퓨터에 얼마나 많이 중독되어 있는 줄 아십니까?



아이들이 몇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이 인터넷과 게임을 합니다. 한국에는 PC방이 참 많습니다. 거기 가보면, 새벽에도 앉을 자리가 없어요. (한국의 전투력은 논산훈련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PC방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맨날 전쟁연습이에요) 애들이 집에는 안들어가고, 밤새 거기서 오락하는 겁니다. 오락이 주로 뭔가요? 칼들고 사람 죽이고, 총쏴서 사람 죽이는 거에요. 누가 사람 더 많이 죽이나, 경쟁이죠. 경쟁. 밥먹으면서도 컴퓨터를 합니다. 오죽하면, 이런 사람들을 ‘폐인’이라고 부르는 닉네임까지 생겼습니다.

/

중독이지요. 뭔가 웹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는 일들 때문에 잠시라도 오프라인이 되면 견딜 수 없는 현상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여기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애들만 그렇습니까? 인터넷을 통해서, 우울한 주부들이 남자 애인 만든다면서요? 남자 애인 만들어서 몰래 만나다가 남편에게 걸려서 가정이 파탄된 일도 비일 비재 합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왜 교회가 이런 일들을 따라 갑니까? 저희 교회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회행사들과 세규형제의 보석 찾기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저는 이 홈페이지를 볼 때마다 뿌듯해요. 교인들이 거기서 다락방 교재를 다운 받아서 공부하고, 제자훈련생들이 자료들을 받아서 신앙의 훈련을 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 집니다.(큐티, 한국방송)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무분별하게 본받고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한국사람들이 가장 약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유행이랍니다. 한국 사람들처럼 패션에 민감한 사람도 없답니다. 그래서 그러잖아요. 옷 잘못 입고 온 사람보고 ‘이런 패션은 p자도 모르는 사람아!’



전에는 세상이 교회를 많이 본받고 따라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교회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동의회-국민투표, 제직회-국회투표, 당회-국무회의> 다 장로교에서 배운겁니다.



전에는 교회가 사회를 주도했습니다. 서당에서 댕기따고, 시조읇던 시절에, 교회에서는 풍금놓고, 찬송가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완전히 반대가 되어 버렸죠? 세상은, 학교는 멀찌감치 나가고 있는데, 교회 교육은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져 있습니다. 너무 차이가 나서, 애들이 안 오려고 해요. 재미없다구요. 이번에 골프대회가 있었습니다. 골프대회에 많은 분들이 이런 저런 도움을 주셨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 벅찼던 것은. 그 기금으로 교회의 미래인 교육부기자재를 구입한다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교육은 자고로 당장 output이 나오지 않는 사업입니다. 당장은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뿌리가 됩니다. 뿌리가 없이 열심히 교회가 성장해보십시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금새 넘어집니다. 쓰러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귀한 일인 것 같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이의 가정이 세상을 따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는 이의 가정은 분명한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안 믿는 가정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똑같이 본받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뭐로 분간을 하겠습니까? 믿는 이의 가정과 옆집에 안 믿는 이의 가정이 뭐로 구별이 되는 것이 맞습니까? 한국이라면, 교패라도 붙여 놓고 있으니, 믿는 집이구나 알겠지만, 미국은 그것도 없잖아요? 세상 똑같이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믿는 집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구분되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의 원래 히브리어 뜻은 ‘분별됨, 구별됨’의 뜻이 있습니다. 즉, 거룩함은 차이를 말합니다. 차이가 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거룩함이 아닙니다. 믿는 이는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차이를 만드셔야 합니다. 우리 가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신앙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믿지 않는 이와의 차이가 있는가? 거룩함이 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 가치가 없는 가정은 바른 신앙의 가정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아이들이 자기 전에 꼭 기도하고 애들을 재운대요. 거룩한 차이입니다. 거룩함입니다. 이 아이가 자면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 차이와 그 거룩함이 때로는 나를 지킵니다. 우리 아이들을 지킵니다. 때로는 너무 고집스럽고, 세상 왜 그렇게 사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별됨이고, 거룩함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모태신앙은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그래서 모태신앙이라면서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모태신앙은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늦게 믿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열심히 다니셨는데, 어릴 적부터 주일성수만은 세상없어도 지켰습니다. 중학교때 제가 한번 교회를 안가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정말 비오는 날 먼지나게 어머니에게 맞았습니다. 도대체 주일성수가 뭐기에 나를 이렇게 push하시나?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라는 나의 신앙의 가치와 구별과 분별이 나에게 거룩함이란 이름을 붙여주더라구요. 주위 사람들로부터 저 친구는 교회다는 친구야라는 인정하는데, 그 근거가 주일성수였습니다.  



중학교때 일입니다. 저희 반 담임선생님이 아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시키는 것은 타고난 분이에요. 공부 다 하기 전에는 집에도 안들어가십니다. 학생들을 들들 볶습니다. 이분이 독실한 크리스챤인데, 여자분인데도 학생들을 구두발로 차가면서까지 공부를 시키던 분이에요. 시험을 치고 나면, 심판의 날이 다가옵니다. 성적이 오르면 안 맞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정말 심하게 혼나고 맞고 그랬습니다. 점당 10대씩인데, 제가 자그마치 10점이 떨어졌습니다. 계산이 되세요? 애들이 더 걱정을 합니다. 너 죽었다. 동원아 어떻하냐? 제 순서가 되었습니다. 공포가 느껴집니다. 두려워 떠는 저에게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원아. 너 교회 다니지? 나 교회다니는 애들은 믿어. 다음부터 열심히 해라’



이 이야기가 장안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양자선생님에게 성적떨어지고도 매 안 맞은 학생이 있다고, 교회다니면 매 안 맞는다는 소문 때문에 한 때 교회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도 있습니다.



제가 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갑자기 멍해지더라구요. 도대체 교회다니는 것이 뭔가? 제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 안 맞으니까 더 공부 안 했을까요? 아니요! 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 안 가려다가 매 맞은 제에게 이런 대접은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나는 애들하고 다른 사람이구나! 거룩한 사람이구나! 내가 선생님 무서워서 공부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겠구나.  



남들하는대로 다 하고 어떻게 예수님 제대로 믿습니까? 세상을 본받아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업도 남들 노는 것 다 놀고 성공 못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따라가다가 나의 신앙 어디로 가는 줄모르게 됩니다.



믿는 이의 차별화는 무엇입니까?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게 만드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신앙의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를 지키는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가정예배입니까? 드리세요. 그 가치가 우리 가정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말씀묵상입니까?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세요. 그 말씀이 나를 organize해 줄 것입니다.

기도생활입니까? 무릎 꿇으세요. 그 무릎이 나를 살리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처럼, 세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을 본받아 매일 매일, 거룩한 생활하시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신앙이 삽니다. 예배가 죽으면, 신앙이 죽습니다.

오늘 말씀 가장 처음에서 바울이 당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산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예배가 살아야 나의 삶이 산다는 것입니다.



산 제사가 있다면, 반대의 개념도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산 예배고 어떤 것이 죽은 예배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참 두려운 말입니다.



예배를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다.

반응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반응입니다. 지렁이는 밟으면 꿈틀하지요.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 나에게 베풀어 주신 많은 것들에 감격하여 내가 하나님께 그 감사의 반응을 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참 맞는 말이죠.



심앙의 조상들이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감사했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 왕으로 세워주시고,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자손들을 복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반응이 있는 예배입니까?



예배는 신앙의 상태를 측정하는 잣대라고 합니다. 일시적인 현상은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예배를 조시는 분은, 졸면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입니다. 예배시간에 집중이 안되시는 분은, 주님께 집중이 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하시는 분들 중에 신앙이 바로 나가지 못하시는 분들이 참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안타까워요. 바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드리는 것과 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반응이라면, 먼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 중에는 분명,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드림이 있고, 받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①뜨거움이 있고, 그 말씀으로 나의 삶이 ②회복되고 ③충전됨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을 배터리에 비유하는 것이 맞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비유입니다. 자동차 배터리는 어떻습니까? 충전을 해야지 시동도 걸리고, 에어컨도 쓸 수가 있습니다. 불도 켤수 있지요. 그러나, 이 배터리가 완전히 discharge되어 버리면 달릴 수가 없지요. 아무 것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프를 해서 다시 충전을 해줘야 합니다.



믿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지치고, 힘든 삶을 어디서 충전하십니까? 어디서 채울 수가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충전되셔야죠.(교회는 성령충전소) 지금 이 시간이 귀한 시간입니다. 이 귀한 시간 한 마디라도 주님의 말씀 더 들으셔야죠. ①말씀으로 힘얻으셔야 합니다. ②말씀으로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③용서하지 못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을 어떻게 갖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배울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거저 용서함을 받습니다. 제대로 용서받은 사람은,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은혜받고, 내일 직장에 나가면, 아니 오늘 집에 가면, 내가 용서하지 못할, 보기만 해도 혈압이 올라가고,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용서하시렵니까? 저는 목사이지만, 저도 제 힘으로는 못합니다. 그 사람을 피할 수는 있습니다.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이렇게 산다고 무시하고 묵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진짜 용서는 어디에서 옵니까? 예배를 통해서, 내가 용서받을 때에 그 힘이 나옵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생활의 지표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산제사 산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 계셔도 그 마음이 주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받기만 하고, 나를 희생으로 드리는 내가 죽고 주님의 뜻이 사는 희생의 예배가 되지 않는다면, 역시 바른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조금 더 반응있는 예배, 조금 더 살아있는예배, 조금 더 회복이 있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의 삶이 주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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