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이야기 - 은혜 주일 060409-민35

작성자
김동원목사
작성일
2006-04-22 16:07
조회
25492
도피성이야기

민수기 35: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35:14 세 성읍은 요단 이 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마태복음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어떤 꼬부랑 할머니가 자기 집 초인종을 누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허리가 너무 휘어서 초인종을 못 누르는 겁니다. 지나가는 학생이 ‘ 아이구! 저 할머니 도와드려야 겠네...’ 싶어서 할머니 도와드릴까요? 그러구 초인종을 대신 눌러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학생! 눌렀으면, 도망가’

세 살버릇 여든간다고, 남에 집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던 장난을 치던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로부터 치려하고, 도망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도피 수단으로 자살을 택합니다. 한국에서는 하루에도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생활고나, 기타 상상 못할 이유들로 자기의 목숨을 끊습니다. 얼마전 기가막힌 뉴스들을 보셨죠? 자기 자녀 둘을 차에 가두고 같이 자살하려고 불지르고 자기만 탈출한 가장의 이야기... LA에서 일어난 일이죠? 자살을 도피의 수단으로 택했지만, 결코 자살은 도피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자살로부터 자신만 탈출한 아주 우울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현실에 대한 도피로 이민을 꿈꾸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얼마전 한 홈쇼핑회사에서 캐나다 이민을 상품으로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별게 상품이 될 수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 상품이 40분만에 매진되어 버리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성읍의 이름은 바로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은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city of refuge입니다. 즉, 피난할 도시가 되지요.



도피성을 정한 목적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사법제도가 많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 군인들도 적었구요. 혹시 잘못해서 사람을 죽인 사람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한 성읍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옛날 서부영화들을 보면요,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범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평생을 쫓아다니는 일이 많았잖습니까? 무법자에게 참혹하게 숨진, 부모님의 원수! 탕탕탕. 원수를 죽이고 쓸쓸히 돌아서는 주인공의 모습을 뒤로 하고, 자막이 올라가잖아요? 물론 구약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도피성의 위치를 한번 보겠습니다. 지도를 잘 살펴주십시오. 성경에는 6개의 성읍을 이 도피성으로 정하게 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서 드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강서쪽 위에서부터 보면, 가데스, 세겜, 헤브론, 강동쪽에 골란,(골란은 시리아와 분쟁이 있었던 골란고원과 같은 지명입니다.) 길르앗라못, 베셀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지명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알지도 못하는 도시들을 도피성으로 정하시고, 그 위치까지 이렇게 세세하게 정해주신 것일까요? 다음 지도를 살펴보시면 정확한 이유를 아실 수 있습니다. 다음 지도는 당시 도로망을 기준으로 하루동안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를 원으로 표시한 지도입니다.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6개의 도피성만 있으면 이스라엘 전 지역이 모두 커버가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하루만에 도피성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을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요단강 동편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3개의 도피성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강을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강을 건너다가 피해자의 가족들, 즉 복수하러 온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때문입니다.



왜 하필 하루길이었을까요? 하루길이면 피해자의 가족들이 복수를 위해서 추격대를 조직하고 따라오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라는 것입니다. 즉, 충분히 뛰어서 도망칠 수 있을 만한 거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당시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폭이 14미터나되게 큰 길을 냈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지판을 세워놓았습니다. 참 세심한 배려이지요?



옛말에 알아야 면장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도 알면 이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면, 알지도 못하는 도시이름이지만, 우리가 도피성을 주신 하나님의 세세한 배려를 알면 그 도시의 이름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가 알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세세한 법조항이 따라옵니다.

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고살한 자’는 무엇입니까?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리 세밀하게 계획하여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므로 도피성에서 보호하지 않고 반드시 죽이는 것이 원칙입니다.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은 공정하게 재판을 받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호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복수가 법으로 용인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도피성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복수와 용서의 법들은 무엇이 있나요? 성경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법은 무엇인가? 함께 아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배로 갚아주는 복수의 법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구원의 백성이 아닌,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불한당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복수의 화신이였습니다. 자기에게 작은 상처를 입히게 되면, 그 상대가 소년이라 할지라도 죽였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어땠을 것 같습니까? 얌전했을까요? 대부분, 장난 꽤 많이 쳤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좀 그랬습니다. 제 친구하고 그날도 열심히 길거리에서 연탄재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네연탄재 다 모아서 쪼개서 니편, 내편 정해서 전쟁을 하는겁니다. 연탄재로 동네를 다 도배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다이아몬드표 박힌 동원연탄만을 던졌던 지조가 있는 동네소년이었습니다. 열심히 놀던 중, 제 친구하나가 온힘을 다해서 던진, 타다 만 연탄재가 상대방이 아닌, 지나가던 승용차 뒤 트렁크에 맞은겁니다. 그 당시가 70년대였죠, 차가 참 귀한 때였죠. 벤쯔보다 귀한 포니원이었습니다. 그 귀한 차를 찌그러트렸으니, 이 친구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전사아저씨, 그 친구불러서 ‘다음부터 그러지마~!’그러구는 그냥가시더라구요. 참, 감사했습니다.

애들이 잘못하면 대부분 그냥 넘어갑니다. 아직 애라서 몰라서 그러지... 그런데 이 라멕이라는 사람은 애들이 잘못해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얼마나 심한 복수를 했는지, 살인자였던 가인이 7배의 보복을 했다면, 라멕이라는 사람은 77배의 복수를 했다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법이 그러했습니다. 무슨 이런 법이 있냐구요? 있습니다. 이런 법을 약육강식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세상에서는 아직도 이런 법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이 원에 찰 때까지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라멕은 777살이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업적은 자기에게 작은 피해라도 입힌 사람에게 죽음으로 복수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없겠거니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얼마든지 보실 수 있습니다.

얼마전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조직폭력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도 섬찟한 막가파. 기억나십니까? 조금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나 잡아서 무자비하게 살인했던 사람들이죠? 사람들은 그들의 범행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했는가? 막상 그 답을 듣고나서 사람들은 허탈했습니다. 그 막가파의 두목인 최정수라는 사람의 말입니다. ‘어차피 못사는 집에서 태어나면 평생 못사는 것 아닙니까. 구차하게 살기싫었고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내가 못사는 거, 다른 사람 잘사는 것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라멕과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나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 없도록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라는 얘기죠.



성경은 우리에게 역지사지의 태도를 말해줍니다. 역지사지가 무슨 말입니까?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여유입니다. 내가 저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라고 말씀하시잖습니까? 남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고부갈등도 그렇습니다. 시집살이도 당해본 사람이 더 잘 시킨다면서요? 내가 당한 거 그대로 며느리에게 한다면서요? 당한대로 시켜서 뭐 좋은 것 있습니까? 며느리와 사이만 벌어지지.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며느리가 남편에게 물어봅니다.

며느리: 자갸~~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남편: 그야 물론 자기지~~

며느리: 그 다음은?  남편: 우리 이쁜 아들이지~~

며느리: 그럼 세번째는? 남편: 그야 물론 이쁜 자기를 낳아주신 장모님이지~~

며느리: 그럼 네번째는? 남편: 음 ...우리집 개 해피!

며느리: 그럼 다섯번째는? 남편: 우리 엄마?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우리엄마(시어머니), 다음날 새벽에 나가면서

냉장고에 붙여 놓은 메모지

"1번 보아라.. 5번 노인정 간다"  



라멕처럼 수십배의 복수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의 삶이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2.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법입니다.



출애굽기

21: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1: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어떤 법입니까?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이고, 눈을 다치게 한 사람은 눈을 다치게 하고, 손을 다치게 한사람은 그 사람 손을 똑같이 상하게 하고, 발을 다치게 한 사람은 그 발을 똑같이 만들어라라는 법입니다.

이 법은 여러 고고학적인 유물들을 통해서 입증이 된 법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발견된 함무라비왕의 법전이 있습니다. 인류최초의 법전이지요. 그 법전에 보면 이와 동일한 법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 근거없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처의 제자였다느니, 성경에서 믿을 수 있는 얘기는 별로 없으니, 오병이어의 기적같은 것들을 좀 빼 놓고 믿자! 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요즘은 다빈치코드가 유행이잖아요? 말그대로 유행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속에 베스트 셀러이지만, 다빈치코드는 유행입니다. 절대로 그런 책 한권으로 진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 성경을 연구하면 할 수록, 땅을 파서 고고학 유물들을 캐면 캘 수록, 성경은 불변의 사실이라는 것을 학자들은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이 법도, 유사한 법들을 인근 국가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 줄로 믿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법, 치고는 좀 잔인하지 않습니까? 좀 그렇지요? 요즘으로 생각하면 좀 잔인하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큰 사랑의 법입니다. 강자의 횡포에서 약자를 구하는 법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라멕과 같은 불한당, 힘이 있는 사람들은 약한 사람을 사소한 일로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통하여 아무리 힘쎈 사람이라도 라멕과 같이 과하게 처벌하거나 복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 법이 두 번째로 나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률입니다. 이 법을 동태복수법이라고 합니다. 명태도 아니고, 생태도 아니고, 동태에게 복수한다라는 법이 아니고, 당한 그대로만, 더 과하게도 말고, 복수하라는 법입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법이 이런 식의 1대1복수법입니다. 네가 나에게 해를 끼치면, 나도 너에게 해를 끼친다. 네가 나에게 주는 것이 없으면, 나도 너에게 주는 것이 없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좋아할 이유가 없다.



어떤 젊은 친구가 자기 여자친구한테 폼 좀 내려고 아버지 차를 빌려가지고 나왔습니다. 뭐 잘 몰지도 않던 차이니, 잘 몰아지겠습니까? 그냥 더듬더듬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옛날 그랜져, 각그렌져라고 하죠. 까맣게 썬팅해서 안은 보이지도 않는 그랜져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앞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간신히 피한 이 친구 객기를 부려봅니다.

야유~ 저런 사람이 많아서 이 나라가 통일이 안 되는거야~ ‘자기야~ 참아~’

아니야. 복수해야되

그때부터 이 친구가 그 각그렌져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쌍라이트켜고, 크략션 울려가며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횡단보도에서 나란히 섰네요. 이 친구는 분명히 아줌마일 것이다 생각하고 창문내리라고 또 빵빵거렸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운전석 창문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앞 뒤 창문이 다 내려오는 겁니다. 그런데 머리가 스포츠머리, 즉 깍두기머리라고 하는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뭐야!’

이 친구가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났을까요?

‘아저씨~ 미아리 어떻게 가요?’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은 이런 법이 판을 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법은 그리스도인의 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법은 어떤 법일까요?



3.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수의 법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가 하루는 주님께 나와서 우쭐거리며 얘기했습니다.

‘주님!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7번하면 대단한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에게는 의도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사람을 3번까지만 용서해 주고 그 이상은 용서해 주지 말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는 자랑스럽게 7번 용서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요. 하고 물어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요. 용서해주되 그 수를 헤아리지 마라라는 말씀입니다. 즉, 용서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의무이지, 그것을 용서하고, 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고,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내가 저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었구나. 나는 정말 괜찬은 사람이야! 라고 헤아리는 한심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정한 법은 복수의 법이 아니라, 사랑의 법, 평화의 법, 용서의 법입니다.

세상에서는 오른 뺨을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고소하라고 합니다. 법대로 하라고 합니다. 맞은 사람은 발뻣고 자도 때린 사람은주님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대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까지 동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3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법이 꼭 있어야 될 사람입니다. 정말 법이 없다면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지요. 남이 안보면 쓰레기 버리고, 경찰없으면 불법 유턴돌리고, 모두 법이 꼭 있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둘째, 법이 없어도 살사람입니다. 너무 선해서, 법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처벌받을 만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셋째, 법을 너무나 잘 알고, 그것을 초월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준대로 보답하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넘어서서 용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 후배전도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이분의 집이 구리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서울 명동이었구요. 얼마나 멉니까? 그런데 이 전도사님이 부지런합니다. 거기서 새벽기도를 나와요. 그런데 어느날, 이 분이 새벽기도를 나오시다가 구리입구에서 음주운전하고 중앙선을 넘어온, 코란도승용차와 정면충돌을 했습니다. 차는 거의 폐차가 되었고, 사고가 1년이상 지난 지금도 다리를 절고 다닐 만큼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가해자는 큰일이 났습니다. 음주운전만 해도 큰 처벌이 있지요. 그런데 중앙선까지 침범을 했으니 감옥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리고 합의금을 얼마나 내야할지 난감합니다.

이 전도사님이 그 가해자를 만났어요. 얼마나 미웠을까요? 자기 다리, 이렇게 불구로 만들어 놓고, 차도 다 망가뜨리고... 그런데 이 전도사님이 그 사람 손을 잡으며, 다 용서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가해자가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도 용서 못할 죄인을 용서해주고, 합의서써주니, 도대체 그 주님의 사랑이 뭔지 알고 싶어서 근처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도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 가해자분이 첫주부터 너무 열심히 교회를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그 교회 목사님이 너무 궁금해서, 아니 젊으신 분이 신앙이 좋으시네요. 전에 어디 다른 교회라도 다니다 오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주의 종을 다치게 한 죄인입니다.’



77배를 복수하는 것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테러에는 테러로 복수하는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늘 본문에서 본 도피성처럼, 피할 곳없는 죄인 용서해주고, 숨겨주고, 살려주는 용서의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77배의 복수를 하는 사람입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 못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람입니까?

내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 마음의 도피성으로 그 사람을 초대하십시오. 그리고 용서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악을 덮습니다. 정말 용서못할 그 사람. 그 사람을 용서하세요. 그 사람이 나에게 한 대로 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돌려주세요. 사랑이 되어 돌아 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용서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하여 도피성 만들어 주시고, 죄짓고 죽어가는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니 참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기도하옵는 것은 그렇게 큰 사랑 받은 우리들이 그 사랑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 본받아 다른 사람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법을 따라, 내 원대로 복수하고,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죄인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신 주님의 본을 받아 용서함으로 전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기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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