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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장교로 복무했습니다.(1993~1996)1993년 3월 2일에 경남진주 교육사령부로 입교했고, 14주의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공군사관후보생 91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특기교육을 받고, 공군 3975부대, 예천비행장에서 1소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같이 예천으로 배치된 사후91기들의 사진입니다. 군기 바짝 서 있네요. 소위때 군가경연대회에 참여한 모습입니다. 제가 막내 장교라서 억지로 맡았다는... 서울생활하다가, 처음 시골생활을 해보니, 답답한 면도 있었지만, 가끔 인근의 자연을 찾아가는 재미가 솔솔했습니다. 일단 비행장 공기가 너무 좋았고, 가끔 사슴들이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같이 입대한, 같은 과 친구인 신훈소위덕분에 많은 위로가 되었죠. 사진은 문경새재의 모습입니다. 좀 더 멀리가면, 영주가 있었고, 사진은 소백산천문대의 모습입니다. 교회 후배인 이재현과 같이 등산한 기억이 나네요. 중학교때 교회수련회로 방문했던 소백산기도원이 생각납니다. 장교라서 머리가 군인같지 않게 길었습니다. 군생활을 하면서, 점촌시민교회 청년부를 섬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두번씩 부대 안에 있던 아시아나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행복했구요. 25살에 입대해서, 28살에 제대했습니다. 40개월을 복무했지만, 저에게는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고, 같이 근무했던 사병들도 너무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1993년 3월 2일에 입대해서, 1996년 6월 30일에 제대했고, 바로 다음 날부터 서울이동통신에 출근했습니다.김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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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친구들과 제주도여행 1989대학교때 IVF(한국기독학생회) 동아리활동을 했습니다. 연세대 복음누리 소속이었죠. 대학생활을 생각하면, IVF활동 한 것과 친구들 생각밖에 나지 않네요. 지금도 제일 친한 친구들이죠. 같은 대학을 다니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친구들이었기에 그 친근함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토목공학과 강상진의 집에 단체로 놀러가서 민폐를 끼치고 왔었죠. 서귀포근처의 강정이라는 동네였습니다. 정재훈(기계공학), 이일호(법학), 강상진(토목공학), 박상혁(정치외교), 이은홍(사회학), 윤경미(간호학) 강정천에서 은어낙시를 한 후에, 포즈를 취한 겁니다. 저는 사진찍어서 안 나왔네요. 너무 고마웠던 상진이의 부모님과 여동생입니다. 귀한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김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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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학창시절 사진들입니다.저는 서울 봉천동에서 학교를 모두 졸업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 과정을 봉천동에서 마쳤죠. 저에게는 고향입니다. 원당초등학교 소풍때 사진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디있는 지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 다른 반 사진같습니다. 저를 찾아보시죠. 맨 아랫줄의 왼쪽에 있습니다. 옆의 김동수와 염규성이 단짝이었죠. 담임선생님은 남편이 군인이었습니다. 임신 중이셨구요. 제가 졸업한 후에 아기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참 차분한 성격의 선생님이셨습니다. 한번은 조용히 교실에서 남편의 논문을 쓰고 계셨습니다. 남편이 교육 중이어서 대신 논문을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학생 중에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 우리도 북한에 간첩 보내나요?" 선생님이 그냥 웃으시고 대답을 못하시더군요. 중학교로 넘어가죠... 그 옆동네에 있는 관악중학교를 나왔습니다. 제가 1회였습니다. 선배가 없어서... 참 좋았습니다. 서울대공원에 84년에 소풍간 기억이 납니다. 서울대공원이 문을 열고 얼마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3-14반이었죠. 17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반에 70명이니, 한 학년이 1200명 정도였습니다. 교실에서 수업받는 모습입니다. 겨울이었습니다. 난로피워놓고, 한문선생님이었던 류상범담임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저희 반은 2학년때 전교 1등을 했던 반이었습니다. 이양자선생님(가정)이 담임선생님이었죠. 무지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내일이 시험이면, 그 시험공부를 다 해놓고, 교무실에서 선생님께 검사를 맡아야 했습니다. 매일 3장씩 연습장을 앞뒤로 써야 했죠. 1주일이면 21장의 연습장에 공부한 흔적을 남겨야 했습니다. 지독한 선생님이었습니다. 성적떨어지는 대로, 나와서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대단한 열심이었죠. 본인도 아이들의 공부가 끝나지 않으면, 퇴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당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참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한번은 봉사하러 나병환자촌이었던, 성 나자로의 마을에 학생들과 같이 가자고 했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는 교회 다니는 아이니까... 내가 믿는다."하셨던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좀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2학년 때 1등이었던 저희 반을, 3학년에 올라가면서 꼴등반 선생님으로 담임선생님을 바꿨습니다. 아마 학교에서는 그럼 중간쯤 갈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로 꼴등이 되었습니다. 류상범선생님은 기타도 잘 치셨고, 한문을 참 잘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이셨습니다. 남녀 공학이라서, 기억이 가장 많이 남는 학년입니다. 지금도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입니다. 저는 위에서 3번째 줄의 왼쪽 2번입니다. 저 찾으셨죠? 이제부터는 고등학교입니다. 남강고등학교를 13회로 졸업했습니다. 확실히 고등학교때 키가 안 컸습니다. 앞줄에 섰네요. 찾으셨죠? 우리 반 친구들입니다. 존경하는 우리 담임선생님 오강헌선생님(국사)입니다. 정말 저런 선생님 만나기 힘들죠. 전셋집에 사시면서도, 항상 아이들에게 베푸시려 하셨던 선생님입니다. 제가 고3때 불이 어두워서 공부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집에서 쓰시는 스텐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덕분에 대학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지나고 보니... 이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 제가 있는 거네요.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 미국까지 와서 박사학위까지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소중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서울 남강고등학교 2학년 86년 10월, 김홍수, 정광필, 나, 선우성김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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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사진(1969)저는 1969년에 서대문구 상암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장남인 저에게 기대를 많이 거셨던 것 같습니다. 형제 중에 저만 백일사진이 있습니다. 누나도 없고, 동생도 이런 사진은 없습니다. 저만 대학보내시려고 교육보험이라는 것도 들어두셨습니다. 그러다가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금화아파트 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저희 집은 소금가게였습니다. 맨날 소금갖고 놀았던 기억도 나고, 소금이 갈라진 손에 들어가서 쓰렸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집 앞에는 큰 물탱크가 있었고, 친구와 그 위에서 놀다가 빠져서 죽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빈 물통이라 살 수 있었죠. 1969년에 지은 금화아파트는 부실시공 논란 속에 1970년부터 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철거전, 퇴거한 빈 아파트에서 누나와 남동생과 같이 뛰어 놀던 기억이 납니다. 무릎이 까지도록 장판 위에서 무릎 슬라이딩을 했습니다. https://m.khan.co.kr/local/Seoul/article/201508021204091 이건 논란의 사진인데요. 사진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저 사진 찍은 때를 기억합니다. 백주 대낮이었습니다. 저건 분명히 밤이구요. 사진 속에 있는 아이는 제가 분명히 아닙니다. 사진사가 사진을 잘못 준겁니다. 저 사진 속의 친구는 제 사진을 갖고 있겠죠? 1975년에 봉천동에 중국집(영화루, 봉천중앙시장 옆, 봉천 2동(옛) 지금은 봉천 10동)운영을 위해서 이사오게 됩니다.김동원목사